미국 LA의 "No Subway Under the BHHS"과 한국의 제주도 강정마을
나에게 베버리 힐즈는 산책하기 좋은 동네이다. 집들도 예쁘고, 길이 쭉쭉 뻗어있어서 길을 잃거나 헷갈릴 위험도 적다. 그런데 요즘 산책을 하다 보면 베버리 힐즈 곳곳에 이런 피켓이 꽂혀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No Subway Under BHHS"
BHHS는 Beverly Hills Highschool의 약자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집 바로 옆에 있는 고등학교이다. 무슨 일인가 알아봤더니 시에서 LA 다운타운과 West LA를 연결하는 지하철 건설을 계획하고 있는데, 최적의 루트라고 정해진 노선이 베버리 힐즈 고등학교 바로 아래를 지난다고 한다. 이것에 반대하는 베버리 힐즈 주민들이 항의의 표시로 피켓을 꽂아놓은 것이다.
베버리 힐즈 고등학교 바로 옆은 이 주변 금융과 사업 중심지인 Century Park이다. 베버리 힐즈 고등학교를 지나는 노선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최적의 루트를 완공하면 이 곳의 접근성이 높아져 도시의 교통혼잡 문제를 줄일 수 있고, 관광 가치도 올라가서 모두에게 이롭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베버리 힐즈 주민들은 원래 계획이었던 Santa Monica 대로를 지나는 지하철을 건설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 아래에 지하철을 짓는 것은 안전하지 않기 때문에 많은 주민들이 반대하고 있다고 한다. (원래 노선은 지진 발생 시 위험하다는 지질학적 근거 때문에 2안으로 밀려났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베버리 힐즈 주민들을 보고 "님비"라며 비난하고 있다.
하여튼 나는 이러한 일들을 대략적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낮에 집에 있는데 누가 초인종을 눌러서 나가보니 왠 유니폼을 입은 아저씨가 아이패드를 들고 서있었다. 얘기를 들어보니 베버리 힐즈 고등학교를 아래를 지나는 지하철 건설을 지지하는 모임(이라기보단 좀 더 공식적인 단체같았음..)에서 나온 사람이었다. (단체 이름이 기억이 안 남 망할) 그는 나에게 의견을 물어본 뒤 자신들을 지지해주는 서명을 해줄 수 있냐고 물었다. 나는 그 계획에 대해 잘 모른다고 말했더니 좀더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원래 산타 모니카 대로를 지나 스타의 거리로 향하는 노선을 계획했지만, 과학적, 지질학적으로 연구해보니 베버리 힐즈 고등학교를 지나는 지하철이 더 안전하다는 결론이 나왔다는 것이다. 나는 그에게 아직 잘 판단이 안 선다고 말했고 그는 이해한다고 대답했다. 그는 나에게 이런 사회적 쟁점에 대해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듣는 것은 중요하다고 말했다. 우린 훈훈하게 안녕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그 아저씨를 보내고 방으로 돌아와 생각해보니 이런 건 나의 첫 경험이었다. 지역사회에 중대한 의사결정에 대해 시민의 의견을 물어보는 것. 그와 그가 속해있는 단체는 학교 아래를 지나는 노선에 찬성하지만 아닌 사람들의 의견, 왜 그렇게 생각하는 지에 대해서도 아주 관심이 많았다. 생각을 조금 하다 보니 한국의 제주도 강정마을이 떠올라서 서글퍼졌다.
제주도 강정마을에는 세계에 하나밖에 없는 지형인 구럼비라는 바위가 존재한다. 이 바위때문에 강정마을은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생물권보존지역, 세계지질공원으로 선정되었다. 그런 강정마을이 요즘은 아비규환이 따로 없다. 해군 기지 건설을 위해 구럼비를 발파하려는 군과 경찰, 건설사들과 해군기지에 반대하는 주민, 활동가들의 충돌이 끊이지 않고 있다. 공권력은 저항하는 이들을 물리력을 동원해서 제압하며 구럼비 발파를 계속해서 진행중이다.
나는 제주도에 해군기지를 건설하는 것에 반대하지만 오늘 이 글에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그것이 아니다. LA에서는 땅 '아래'를 지나는 지하철 노선 개통을 둘러싼 수많은 가치판단과 입장 때문에 쉽게 공사를 시작하지 못하고 있다. 가능한한 많은 주민의 불만이 없는 최적의 지하철 노선을 찾기 위해 노력중이며, 많은 단체들이 자유롭게 자신들의 의견을 시의회에 전달하고 관철하려고 한다. 강정마을은 어떤가? 강정마을에 지으려고 하는 것은 지하철이 아니다. "군사 기지"를 지으려고 하고 있다. 이는 제주도, 강정마을 주민들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끼칠 것이 분명하다. (지하철을 짓느냐 마느냐보다 훨씬 직접적으로 삶의 질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하지만 군은 이러한 의견을 모두 무시한 채로 공사를 속행하고 있다.
군은 해군기지 건설이 강정마을 주민들의 동의 하에 추진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사실 거짓말이다. 1500명 주민들 중에 해군기지 건설에 우호적인 주민 80명만의 의견을 수렴했다. 그래놓고 만장일치라면서 사람들을 기만하고 있다. 그리고선 해군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게 어떻게 정당한가? 2009년에 강정마을 주민 110명을 대상으로 한 정신심리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강박증 등 이상을 호소한 사람이 75.5%, 자살충동을 느낀 사람이 43.9%, 실제 자살 계획을 자거나 시도한 사람이 34.7%라고 한다. 지역주민들의 의견을 무시한 결과, 해군기지는 그들의 생명까지 위협하고 있다.
해군기지를 건설하는 것에 대해 반대할 수도 있고, 찬성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사회구성원들의 목소리를 무시하지 않는 것이다. 공동체 모두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안에 대해서는 그것에 대한 정확한 사실을 명시하고 그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고 종합하여 최적의 결론을 낼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공동체의 대표들이 할 일이다. 미국의 도시에서는 지하철 하나 짓는 것 때문에 모두의 의견을 모으고 조율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한국의 군대와 정부는 "이것이 국가를 위한 일이다"라며 강정마을 사람들이 희생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민주주의가 원칙인 세계 어느 나라도 이런식으로 국민에게 무자비하게 굴지 않을 것이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무시하는 국가가 안전하고 경제력이 우수한들 시민의 삶이 윤택하다고 할 수 있을까?
(LA 지하철 확장에 대해서는 아래의 두 기사를 참조했다.
http://beverlyhills.patch.com/articles/beverly-hills-remains-steadfast-against-tunneling-under-homes-high-school
http://www.huffingtonpost.com/2011/11/12/westside-subway-extension-beverly-hills_n_1090059.html)